서랍。



단편집입니다. 여전히 사건 자체와 별개로 청춘의 밝은 면, 어두운 면을 고루 섞어놓아서 에피소드 하나하나도 완성도가 높고, 전체적인 주제도 있습니다.

반면에 단편집에서 전체적인 주제를 생각하다 보니 첫 에피소드가 영 껄쩍지근 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애니로도 봤는데, 애니에서도 가장 별로였습니다. 주인공이 음습한 짓을 하는 데다가 비는 내리지, 혼잣말 하지, 친구한테 핀잔도 듣지...보는 제가 다 칙칙해졌습니다. 이 책 후기를 읽고 나서야 왜 이렇게 칙칙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1편은 희생된 거다...완성도를 올리기 위한 희생...그 희생 말이지...

개인적으로 좋았던 에피소드는 <대죄를 짓다>랑 <수제 초콜릿 사건>이었습니다. <대죄를 짓다>는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치탄다의 심정에 몰입하면서 읽었고, <수제 초콜릿 사건>은 <쿠드랴프카의 차례>의 연장선에서 좋았습니다. 가벼운 역할을 맡은 조연의 뒷이야기는 클리셰라고 해도 늘 빠져듭니다.

하지만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멀리 돌아가는 히나> 마지막 부분, 데릴사위로 들어가겠다는 말을 못하고 혼자 쑥쓰러워서 딴소리 하는 호타로입니다. 나도 호타로 같은 남자 며느리 있으면 참 좋겠네



<통속을 향한 유쾌한 냉소>


우리가 흔히 통속적이라 하는 내용이 거의 다 들어있지 싶다. 섹스, 연애, 사랑, 명예, 돈. 싸움이랑 피랑 폭발만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싶기는 하지만, 그러면 '옥희와 영화'가 아니라 '옥희와 헐리우드 영화'가 되니까.


흔히 홍상수 감독을 '일상의 달인'으로 부르곤 하는데, 나는 좀 일상이랑 이건 다르지 않나 했다. 일상보다는 조금 자극적이고 특별한 사건 아닌가. 일상은 자다가 일어났다가 자다가 일 나갔다가 자다가 밥먹고 자는 거지. 나는 그보다는 훨씬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나타냈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뭐 그게 진해지는 순간마다 위풍당당 진행곡을 깔아주니까 뭐 이건 냉소를 해야 하는지 진짜 웃어야 하는지 싶었다. 솔직하게 좀 웃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는데, 홍상수 감독의 미묘한 거리감이 어느 쪽을 취해도 좋을 정도로 좋다. 뭐 아니라고? 위풍당당 행진곡 큐! 빰~빰바바바밤~빠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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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빙과> 때부터 느꼈지만 주제 선정,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스타일 자체가 제 취향이라서 정말 즐겁게 읽었습니다. 고전부 시리즈의 장점 중 하나는 역할 배분이 절묘하게 되어 있다는 점인 것 같아요. 주인공인 고전부원 4인의 포지션 선정을 훌륭하게 해 놓고 학교 곳곳에 시선을 흩뿌려 놓으니 축제의 분위기가 정말 잘 전해졌습니다. 이 정도로 학원제 분위기를 잘 살린 소설은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 밖에 생각이 안 납니다.

다양한 인물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작품은 산만해지기 쉽다는 단점이 있는데, 사실 이 작품도 복선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조금 산만해지긴 합니다. 하지만 사이즈가 원체 큰 이야기가 아니니까 헷갈리거나 그럴 일은 없어요. 조금 헷갈려도 금세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오레키의 동선이 간소화되어 있다는 건 장점이자 단점인데, 장점을 들자면 탐정 역인 오레키의 분량을 줄여 일상과 비일상의 배분을 매우 절묘하게 했다는 점, 단점을 들자면 해결부가 다소 무리하게 진행되는 점이 그렇습니다. 범인을 밝히는 과정을 최후의 최후로 미뤄 살짝 역순으로 보여주는데, 그 때문에 안정감 있게 진행되던 템포가 약간 비약합니다. 의도적이었겠지만, 오레키의 시선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범인을 밝히는 과정이 다소 뜬금없게 느껴집니다.

다른 고전부원들은 학원제 나흘간 각자 의미 있는 경험을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작품의 진상을 듣는다든지, 가치관에 반하는 행동을 해본다든지, 친구처럼 변화해보고자 무리한 목표에 도전한다든지. 그런데 오레키는 그럴만한 게 없죠. 다른 아이들이 발로 뛰어다닌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으니까.
그래서 작가는 오레키를 위해 '볏짚 부자 프로토콜'도 만들고, 중요한 과제인 '괴도 십문자 잡기'도 남겨 두지만 이건 오레키 호타로 개인에게 별 의미 있는 일은 아닙니다. 다른 아이들의 경험이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물물 교환 릴레이나 범인 찾기는 개인적이기에는 다소 모자란 사건이죠. 일어나든지 말든지 하는 작은 해프닝, 혹은 문집을 팔기 위한 방편이에요.


이 점은 같은 시리즈의 전작 <빙과>나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에서 보여준 오레키-사건의 관계와 비교해 보면 더 잘 드러납니다.
<빙과>에서 오레키는 사건에 차츰차츰 휘말려 들어가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졌고, 최후에는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 영문 모를 분노까지 느낄 정도로 깊이 공감하게 되죠.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에서는 이리스에게 휘둘려서 거짓 진상을 밝혀냈다는 자괴감에, 그 사실을 부원들에게 지적 당했다는 사실까지 겹쳐 폭주해서 진상을 밝혀냅니다. 이 두 사건은 오레키가 자신을 성찰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오레키 자신을 변화시키려 하는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이 겹쳐서 오레키와 전혀 상관 없던 사건이, 개인적인 사건으로 변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요.

도식으로 그리면 이렇게 됩니다.


동료들이 사건을 가져옴->동료 때문에 추리를 함->추리가 잘못되었다는 게 밝혀짐->잘못을 고치기 위해 진상을 추리해냄


<빙과>와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는 이 도식을 따라서 '에너지 절약주의자'를 자청하는 오레키 호타로가 명탐정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점층적으로, 또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어요. 하지만 이번 <쿠드랴프카의 차례>는 거기까지 들어가지는 않죠. '십문자 사건'은 오레키나 고전부원 동료들에게 개인적으로 개입해 들어오지 않아요. 반대로 고전부원들이 문집을 팔기 위해서 공격해 들어가죠. 그래서인지 오레키와 사건간의 관계는 이전과 다르게 조금 멀고, '십문자의 진상을 추리해냄'에서 '십문자를 협박하여 문집을 팔아치움' 사이에 약간의 비약이 발생해요. 이해는 되면서도 공감은 되지 않는 정도의 아주 미묘한 비약이죠.


그런데 또 이렇게 비약을 해서 결국 보여주고자 했던 진상이 굉장히 재밌습니다. 구구절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요는 '저녁에는 송장이'라는 작품 속 가상의 추리만화를 둘러싼 두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한 축은 고전부원 이바라 마야카가 만화 연구회 부원으로서 가장 존경하는 작품인 '저녁에는 송장이'의 내막에 서서히 접근해 가는 과정이고, 또 하나는 탐정역 오레키 호타로가 '십문자 사건'을 추리해나가는 중에 '저녁에는 송장이'라는 작품이 사건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한 축입니다.
그런데 첫작 <빙과>에서 이미 학원제의 속칭인 '간야제'가 비극적인 이름임을 설정하고 들어가서일까요? '저녁에는 송장이'라는 작품에 얽힌 이 두 이야기도 약간 쓸쓸하고, 조금은 비극적이며 어딘가 씁쓸한 느낌으로 막을 짓네요. 학원제의 떠들썩한 밝은 면과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어두운 면을 배치한 요네자와 호노부의 솜씨가 정말 감탄이 나오도록 좋았습니다. 

 



단편집입니다. 여전히 사건 자체와 별개로 청춘의 밝은 면, 어두운 면을 고루 섞어놓아서 에피소드 하나하나도 완성도가 높고, 전체적인 주제도 있습니다.

반면에 단편집에서 전체적인 주제를 생각하다 보니 첫 에피소드가 영 껄쩍지근 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애니로도 봤는데, 애니에서도 가장 별로였습니다. 주인공이 음습한 짓을 하는 데다가 비는 내리지, 혼잣말 하지, 친구한테 핀잔도 듣지...보는 제가 다 칙칙해졌습니다. 이 책 후기를 읽고 나서야 왜 이렇게 칙칙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1편은 희생된 거다...완성도를 올리기 위한 희생...그 희생 말이지...

개인적으로 좋았던 에피소드는 <대죄를 짓다>랑 <수제 초콜릿 사건>이었습니다. <대죄를 짓다>는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치탄다의 심정에 몰입하면서 읽었고, <수제 초콜릿 사건>은 <쿠드랴프카의 차례>의 연장선에서 좋았습니다. 가벼운 역할을 맡은 조연의 뒷이야기는 클리셰라고 해도 늘 빠져듭니다.

하지만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멀리 돌아가는 히나> 마지막 부분, 데릴사위로 들어가겠다는 말을 못하고 혼자 쑥쓰러워서 딴소리 하는 호타로입니다. 나도 호타로 같은 남자 며느리 있으면 참 좋겠네

동방향림당

리뷰2016. 2. 1. 14:25

동방향림당


  환상향에는 역사다운 역사가 없다. 그것은 매일이 평화롭기 때문도, 이변이 금방 해결되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요괴의 수명이 지나치게 길기 때문이다. 역사가 될 사건이라도 당사자가 살아 있는 이상 자신의 형편에 맞게 정보가 계속 변화해, 그 애매한 정보 위에 서 있는 사실이 아무리 지나도 고정되지 않는다...(생략)...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객관성이 가장 중요하지만, 당사자가 계속 생존해 있으면 좀처럼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환상향에는 역사가 없는 것이다.
  나는 바깥 세계에서 들어온 종이에 가능한 한 객관적인 눈으로 본 환상향을 기록하려고 한다. 이것이 역사로 이어진다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 가장 최초의 역사가 된다. 가장 최초의 역사라는 것은 환상향의 역사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첫머리에 「환상향의 역사가 탄생했다」고 적었다.

  /동방향림당



그렇게 이야깃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모리치카 린노스케라는 캐릭터(설정상 『동방향림당』의 화자이자 저자)의 시선을 통해 환상향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재밌는 책입니다.

컴퓨터를 바깥세상에서 널리 쓰이는 식신으로 받아들인다거나, 마네킹 팔을 인간의 팔로 착각하고 두려워하는 건 클리셰적 코메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환상향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이기도 합니다.

황당무계한 이론으로 상식을 부정하는 린노스케나, 현실에 무관심하고 제멋대로 단정을 지어버리는 나머지 소녀들이나 현실 속 우리가 보기에는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그쪽 세계에서는 그런 이론으로 로켓을 만들고, 세상을 구하니 말입니다.

분명 그쪽 세상에서 바라보면 민주주의니 과학문명이니 하는 게 얼마나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을까요? 아마 지구도 100년 전으로 돌아가면 비슷한 말을 들었을 게 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동방향림당』은 역사서는 될 수 없어도, 단순히 설정을 읽는 것보다는 더 분명하게 환상향의 세계를 느낄 수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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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을 좋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이건 꽤 좋았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키친>을 읽었을 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시작부터 주인공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새 여자와 만나서 살기 시작하고, 딸인 내가 그런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아버지와 여자 사이에 아이가 생기고, 여자는 너무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아서 얼마 안 가서 죽고. 이런 과정을 어렸을 때 봤다면 아무런 느낌이 없었을 텐데,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 보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말년이 겹쳐 보이면서 좀 시큰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이 아주 착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그막의 연애를 두고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거나,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유산을 노리고 아빠에게 접근하는 것 아닐까 주인공이 의심하기는 하지만, 그런 나쁜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스쳐 지나가는 풍문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거든요. 필요하고 하고 싶은 것만 간결하게 써서 그런지는 몰라도 닥쳐오는 사건을 그저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요시모토 바나나의 세계관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아버지는 일 그만둬도 동장인 친구 소개로 조각 팔면서 먹고 살고, 딸이며 죽은 엄마 형제가 먹을 것도 갖다주고, 심지어 노산 때문에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죽어도 그냥 그걸 착한 마음으로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건, 보기는 좋을 수도 있지만 역시 너무 선한 세계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보다 이야기 바깥(현실) 세계에 속하는 이모는 한번 아르헨티나 빌딩을 찾아오더니 '너저분함에 충격받아서' 다시는 안 오잖아요. 이게 일반적인 감성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의 감성은 다른가? 잘모르겠네요.

 

선한 세계관이라고 하고 보니 사촌이 주인공을 범하려고 해서 주인공이 경찰에 신고까지 할 정도였는데 그 다음에도 멀쩡하게 같이 산다는 게 충격적이었습니다. 남자는 틈만 나면 여자한테 덤비는 멍청한 놈들이라는 시선이 익숙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범한다'라는 단어의 무게가 조금 충격적이네요. 게다가 경찰이 와서 혼만 내고 말았다는 것도 그렇고, 그러고 나서 사촌이 한다는 말이 "너는 한다면 하는 애니까."라니 이게 말이야 방귀야. 일본 여자는 남자가 범하려 들어도 좀 혼내주면 얌전해진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것도 일본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ㄴ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요시모토 바나나 이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