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할머니-요시모토 바나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을 좋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이건 꽤 좋았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키친>을 읽었을 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시작부터 주인공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새 여자와 만나서 살기 시작하고, 딸인 내가 그런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아버지와 여자 사이에 아이가 생기고, 여자는 너무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아서 얼마 안 가서 죽고. 이런 과정을 어렸을 때 봤다면 아무런 느낌이 없었을 텐데,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 보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말년이 겹쳐 보이면서 좀 시큰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이 아주 착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그막의 연애를 두고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거나,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유산을 노리고 아빠에게 접근하는 것 아닐까 주인공이 의심하기는 하지만, 그런 나쁜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스쳐 지나가는 풍문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거든요. 필요하고 하고 싶은 것만 간결하게 써서 그런지는 몰라도 닥쳐오는 사건을 그저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요시모토 바나나의 세계관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아버지는 일 그만둬도 동장인 친구 소개로 조각 팔면서 먹고 살고, 딸이며 죽은 엄마 형제가 먹을 것도 갖다주고, 심지어 노산 때문에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죽어도 그냥 그걸 착한 마음으로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건, 보기는 좋을 수도 있지만 역시 너무 선한 세계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보다 이야기 바깥(현실) 세계에 속하는 이모는 한번 아르헨티나 빌딩을 찾아오더니 '너저분함에 충격받아서' 다시는 안 오잖아요. 이게 일반적인 감성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의 감성은 다른가? 잘모르겠네요.
선한 세계관이라고 하고 보니 사촌이 주인공을 범하려고 해서 주인공이 경찰에 신고까지 할 정도였는데 그 다음에도 멀쩡하게 같이 산다는 게 충격적이었습니다. 남자는 틈만 나면 여자한테 덤비는 멍청한 놈들이라는 시선이 익숙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범한다'라는 단어의 무게가 조금 충격적이네요. 게다가 경찰이 와서 혼만 내고 말았다는 것도 그렇고, 그러고 나서 사촌이 한다는 말이 "너는 한다면 하는 애니까."라니 이게 말이야 방귀야. 일본 여자는 남자가 범하려 들어도 좀 혼내주면 얌전해진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것도 일본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ㄴ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요시모토 바나나 이상해.